연내 자본 채워야 할 텐데, 産銀 압박 따르기도 버거워
'자율' 재편이라 강제 어려운 만큼 産銀 역할 확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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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천NCC가 연말까지 자본을 채울 수 있을지 시장이 반신반의하고 있다. 유사시 1차적으로 지원 책임을 져야 하는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도 사정이 빠듯하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이 주주사를 압박하고 있지만 결국 구조조정 부담을 전면에서 쥐게 될 거란 전망이 늘고 있다.
지난달 여천NCC는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에서 3000억원을 대여받아 겨우 부도를 면했다. 그러나 부채비율은 380%까지 늘어나며 기한이익상실(EOD) 위험은 더 높아졌다. 그간 발행한 회사채 관리계약에는 ▲부채비율을 400% 이내로 관리하고 ▲A- 이상 신용등급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이 담겨 있다. 부채가 좀 더 늘어나거나 신용등급이 한 단계만 떨어져도 투자자들이 EOD를 선언할 수 있는 상황이다.
투자업계에선 여천NCC 지분 50%씩을 쥔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의 유동성 확보 작업을 주시하고 있다. 부도가 나기 전에 자본을 채워 넣으려면 양사가 실탄을 쥐고 있어야 하는데 모두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난 6월말 기준 한화솔루션의 부채비율은 178%, DL케미칼의 부채비율은 355%였다. 당기순손실을 지속하고 있어 자력으로 빛을 줄이기 힘든 상황인 것도 마찬가지다. 한화솔루션도 차환 일정을 소화하기 힘들어 단기자금에 기대고 있다. 산업은행이 증자 대신 대여금을 투입한 양사에 출자전환을 요구했다지만 따르기 쉽지 않은 상황으로 풀이된다.
증권사 화학 담당 한 연구원은 "여천NCC 문제에 대한 한화와 DL의 시각도 일치하지 않고, 계속해서 증자에 나서줄 형편도 안 된다"라며 "산업은행이 양사가 그동안 여천NCC에서 배당으로 뽑아간 만큼을 책임지고 돌려놔라고 압박해도 이미 다 써버리고 없는 상태에 가깝다"라고 설명했다.
한화솔루션이 한화에어로스페이스에서 자금을 대여받는 방안도 검토됐지만 배임 우려가 발목을 잡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주주 입장에선 방위산업 성장성에 투자한 돈이 계열 석유화학 구조조정으로 새 나가는 게 달갑지 않기 때문이다. 모회사에 유상증자를 요청하기엔 ㈜한화도 현금이 부족하다. 연초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유상증자가 잡음을 크게 일으킨 탓에 유상증자 카드 자체가 부담스러울 거란 관측도 많다.
DL그룹에선 1조원 규모 DL에너지 매각 대금을 기다리고 있지만 성사 시점을 장담하기 어렵다. 업계에선 DL그룹이 내심 여천NCC의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 작업)을 바라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연내 매각 작업이 마무리되더라도 확보한 대금을 얼마나 내놓을지도 불확실한 셈이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돈이 없으면 그룹사가 나서서 책임을 지는 식으로 일이 진행됐겠지만 개정상법 이후로 이마저 쉽지 않아졌다"라며 "주주 입장에서는 회사 자금이 회수 불가능한 영역으로 흘러가는 걸 당연히 반대할 수밖에 없다. 이미 신용평가사들도 이런 변화를 반영해서 평가체계에 반영하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단기간 내 답답한 상황이 해소되기 힘들다 보니 산업은행의 부담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부가 자율 구조조정 깃발을 내세웠지만 민간을 직접 강제할 수단이 마땅치 않아 결국 산업은행이 가교 역할을 맡아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지난 15일 산업은행은 박상진 전 준법감시인을 신임 회장으로 맞이했다. 산업은행 첫 내부 출신 회장으로 기업 구조조정과 금융법 전문가로 통한다. 올 들어 산업은행이 구조조정실을 재편하고 인력을 보강해온 만큼 박 회장도 취임 일성으로 전통산업 생산성 제고와 산업구조 재편 지원 등을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현재 여수와 울산, 대산 등 산업단지마다 주채권은행을 세우는 등 방안이 오르내리지만 석유화학 업계 사정을 감안하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단순 채무 조정이나 유동성 공급만으로는 구조 재편을 마치기 어려운 탓이다. 산단마다 납사분해설비(NCC) 생산능력이 다르고 10개 업체의 전후방 연계 구조가 달라 사업적 전문성이나 강제력을 갖춘 주체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업계 한 관계자는 "지금 석화 구조조정은 사업, 재무 양면을 동시에 손봐야 한다"라며 산은이 시중은행에 비해 산업 이해도가 높다고 단언하긴 어려워도 구조조정 전문성이나 정부 범부처 협력을 끌어내기 쉬운 국책은행이 키를 쥐는 게 현실적인 수순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