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소 바이오·AI 예심, 사업성 요건 완화 '기대감'
입력 2025.09.23 07:00
    바이오·AI 중심으로 심사 기류 전환…"기술력 자체 본다" 강조
    최근 10년간 거래소 미승인 절반이 바이오…"특정 산업군 집중" 불만
    정부 벤처 활성화 정책과 맞물려…내년 체감 효과 여부 관건
    • (그래픽=윤수민 기자) 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최근 2~3년새 부쩍 높아진 상장 예비심사 허들이 다소 완화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정부가 '벤처기업 활성화'와 '중복상장 지양'을 상장 관련 정책 기조로 내세우는 가운데, 한국거래소도 파두 사태 이후 사업성에 집중하던 기조에서 벗어나 기술력 중심 심사로 방향을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1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거래소는 지난달 초 주요 증권사 5곳과 간담회를 열고 바이오 심사 방향을 논의했다. 신약개발 기업은 임상 단계와 라이선스 아웃(기술 수출) 경험을, 의료기기 기업은 의료기기 인허가 진행 여부와 사업화 지속 가능성을 중점 요소로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단순 매출·논문·특허 건수 같은 정량 지표보다 기술 경쟁력과 미래 성장 가능성을 분리해 보겠다는 의미다.

      그동안 투자업계에서는 거래소가 발행사의 매출 등 '사업성' 위주로 심사를 강화해왔다는 인식이 커지며 불만이 제기돼 왔다. 이런 여론도 정부의 정책 기조와 맞물리며 심사 기조 전환의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대상은 바이오와 AI(인공지능) 섹터다. AI는 글로벌 시장에서 성장성이 확실시되는 분야로 꼽히고, 바이오는 최근 10년간 상장예비심사 탈락 기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완화 필요성이 크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바이오는 특히 '심사가 까다로운 섹터'로 꼽힌다. 최근 10년간 상장예비심사에서 탈락한 27개 기업 가운데 14곳이 바이오였다. 전체 미승인 건수의 절반 이상이 특정 업종에 집중된 셈이다. 증권가에서는 "바이오는 예외 없이 현미경 심사가 적용돼 왔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올해도 사례가 있었다. 지난 4월 신약개발사 제노스코는 기술성 평가에서 최고 등급(AA·AA)을 받았지만 '중복상장' 논란에 막혀 탈락했다. 7월에는 진단키트 업체 젠바디가 미승인됐다. 

      젠바디는 지난해 매출이 전년 대비 60% 이상 증가한 207억원을 기록하며 성장성을 입증했으나 거래소는 실적 불안정성 등을 이유로 든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업계에서는 "제도가 표방하는 '미래 성장성 평가'보다 매출 등 사업성이 여전히 중요 잣대로 작동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AI 기업에 대한 별도 가이드라인도 마련되고 있다. 다만 업계 일각의 예상과 달리 'AI 전용 특례상장'이 신설되는 것은 아니다. ICT(정보통신기술) 기업을 담당하는 거래소 기술기업상장부 2팀이 AI를 전담해 기존 틀 안에서 세부 기준을 보강하는 방식이 유력하다. 

      거래소 관계자는 "AI는 앞으로 대거 상장을 추진할 수 있는 분야라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며 "증권사 등 업계 실무자들과 논의하며 세부 기준을 정리 중"이라고 설명했다. 거래소는 이달 초에는 벤처캐피탈(VC) 관계자들을 불러 심사 방향 등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번 변화는 상장 제도 운영 방식 자체의 변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간 전반적인 심사 허들을 높여온 기조에서 벗어나, 성장 가능성이 높은 섹터를 중심으로 문턱을 합리적으로 조절하는 흐름으로 읽힌다.

      업계에서는 거래소의 전향적 움직임을 두고 정책적 배경을 지목한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 이후 중복상장 지양과 함께 벤처기업 활성화를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금융당국도 이에 발맞춰 코스닥 기술벤처 상장 유치에 적극적이다. 지난 7월 거래소 주관 IR 행사에서 "특례상장 심사 기준을 보다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발언이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 증권사 ECM 관계자는 "대기업 계열사를 제외한 바이오·AI는 일반적으로 중복상장 리스크가 적고, 기술 중심 벤처로서 정책 방향과도 맞아떨어진다"며 "주관사들도 해당 업종 발굴에 다시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거래소는 추석 연휴 이후 증권사 IB 실무자들을 대상으로 간담회를 열고 AI 기업 심사 기준 등 가이드라인을 구체화할 계획이다. 한 IPO 실무자는 "기술력 중심으로 기조를 바꾸려는 것은 어쨌거나 긍정적인 신호"라며 "주관사들도 AI 분야를 중심으로 코스닥 유망 기술기업 발굴에 다시 속도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심사 난이도가 실제로 낮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거래소가 업계와 협의하며 기준점을 조정하고 있지만, 완화 효과를 체감할 수 있는 시점은 내년 정도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거래소가 유망 AI·로봇·바이오 등 벤처 후보군을 적극 유치하라는 메시지를 주관사에 던지고 있지만, 실제 심사 과정은 여전히 까다롭다는 게 현장의 공통된 반응이다. 한 증권사 IPO 담당자는 "거래소가 적극적으로 '상장을 시도하라'는 분위기를 띄우고 있지만, 예심 단계에서는 검증 강도에 큰 변화가 체감되지 않는다"고 말했다.